(존 웨슬리 이야기 107) 찰스 웨슬리의 죽음

(존 웨슬리 이야기 107) 찰스 웨슬리의 죽음

시온 0 4


존 웨슬리의 동생 찰스 웨슬리는 1788329일에 태어나 81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습니다. 찰스의 죽음을 알리는 속달 편지가 주소를 잘못 적어서 존 웨슬리에게 아주 늦게 전달되었습니다. 덕분에 존 웨슬리는 동생의 장례식을 하루 전에 알아서 동생의 장례식에 가질 못합니다.

 

존 웨슬리는 북부 공장지대인 마클스필드에서 야외설교를 하던 도중에 동생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는 동생 찰스를 기억하면서 설교를 듣던 성도들과 함께 찰스가 작사한 찬송을 부릅니다.

 

오라 위에 있는 친구들을 바라보라

하늘의 상을 얻은 그들과 연합하자

 

찰스는 존 웨슬리와 함께 감리교 부흥 운동에 힘을 쏟았지만, 영국 성공회에 대해 끝까지 충성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1778년 감리교가 신축 봉헌한 시티로드 예배당의 묘지에 묻히지 않고 영국 국교회 교구 묘지에 묻히길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살던 집에서 제일 가까운 영국 성공회 메릴본(Marylebon) 교구 묘지에 묻혔습니다.

 

존 웨슬리는 형제 중에 누이동생인 마르다를 제외하고 가장 오래 살았습니다. 그는 부모님과 모든 형제자매의 죽음을 모두 목격했습니다. 집을 나간 아내의 죽음도 목격했습니다. 또 믿음의 동역자 휫필드의 죽음과 많은 동역자의 죽음도 보았습니다.

 

존 웨슬리는 많은 죽음 중에도 감정적인 동요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나 동생 찰스 웨슬리의 죽음 앞에서는 달랐습니다. 존 웨슬리는 찰스가 죽은 지 2주가 지났을 때 볼튼 신도회에서 설교하다가 교인들에게 찰스가 작사한 찬양 씨름하는 야곱를 부르자고 제안합니다.


교인들과 함께 찬송을 부르던 존 웨슬리는 다음과 같은 부분에서 울음을 터트리고 맙니다.

 

나의 친구들은 다 가고

이제 나만 홀로 남았구나

주님과 함께 나 홀로 여기 있네

 

존 웨슬리는 강대상 앞에 주저앉아 한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는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리고 몸을 가누지 못한 채 계속 흐느껴 울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찬송을 부르던 성도들도 함께 흐느껴 울었습니다. 한참 지난 후에야 존 웨슬리는 정신을 차리고 예배를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찰스 웨슬리는 존 웨슬리의 동생이자 감리교 부흥 운동의 가장 좋은 동역자였습니다. 찰스는 네 아래의 동생으로 평생 존 웨슬리와 함께 같은 길을 걸으며 가장 좋은 친구의 역할을 했습니다. 찰스가 작사한 찬양들은 감리교 부흥 운동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찰스의 죽음 앞에 존 웨슬리는 가장 슬프고 약해진 모습을 보였습니다. 존 웨슬리는 그 누구의 죽음 앞에서도 이만큼 눈물을 흘린 적이 없었습니다.

 

찰스가 죽은 이후 존 웨슬리는 동생의 가족들에게 모든 사랑을 쏟았습니다. 건강이 나빠진 동생의 아내 사라를 위해 조용히 쉴 곳을 마련해주었습니다. 자식이 없던 존 웨슬리는 동생의 자녀들을 자기 자녀처럼 여기면서 그들의 장래를 위해 힘을 다해 도왔습니다.

 

찰스 웨슬리의 자녀들은 모두 훌륭하게 컸습니다. 아들 존은 유명한 오르간 연주자가 되었고, 아들 사무엘은 교회 음악 작곡가와 바이올린 연주자가 되었습니다. 딸 사라는 시인이 되었습니다. 사무엘의 아들은 교회 음악사에 유명한 오르간 연주와 오르간 작곡자가 되었습니다. 그가 바로 사무엘 세바스찬 웨슬리입니다. 그는 찰스 웨슬리의 손자로 우리나라 통일 찬송가 242교회의 참된 터는 우리 주 예수라를 작곡한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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