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웨슬리 이야기 84) 존 웨슬리의 치유 목회와 노예해방운동

(존 웨슬리 이야기 84) 존 웨슬리의 치유 목회와 노예해방운동

시온 0 12


존 웨슬리는 의학을 공부해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원시의학이란 책을 썼습니다. 이 책은 1747년에 처음 출판되어 1850년까지 무려 23회나 반복해서 출판되었습니다. 이 책을 통해 가난한 사람들은 질병 치료와 질병 예방과 건강 증진에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런던의 의사들은 존 웨슬리가 의학서적을 썼다는 것을 비난하며 그를 돌팔이 의사라고 불렀습니다. 이런 의사들의 비난은 그가 쓴 의학서적을 더 많은 사람에게 알리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의사들의 비난이 쏟아지자 책은 주문량을 따라지 못할 정도로 큰 인기를 얻게 됩니다.

 

존 웨슬리가 쓴 의학서적은 병의 치료뿐만 아니라 건강을 관리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책에는 병의 예방을 위한 운동 요법, 다양한 식이요법, 절제 요법, 휴식과 수면요법, 냉온탕 요법 등 다양한 건강 증진 요법들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존 웨슬리는 가난한 사람들의 치료를 돕기 위해 브리스톨과 런던에 약초를 재배하기도 했습니다. 브리스톨에 있는 그의 약초밭에는 지금도 약초가 자라고 있습니다. 존 웨슬리는 자기 수입을 위해 환자의 병을 오래 끌고 터무니없이 비싼 치료비를 요구하는 악덕 의사들을 비판했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존 웨슬리는 가난한 사람들의 신경성 질환을 치료하기 위해 직접 전기치료 기계를 연구하여 개발하기도 했습니다. 존 웨슬리가 개발한 기계를 통해 신경성 질환, 위장병, 신경통, 불면증, 우울증, 두통 등의 병을 치료하는 데 큰 효과를 보았습니다.


존 웨슬리는 가난한 자들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간단한 의학과 기도를 동시에 사용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능력 있는 치유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존 웨슬리는 18세기 노예해방운동가로도 활동했습니다. 그는 1736년 미국에서 흑인 노예들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백인들은 쇠붙이 도장을 불 속에 시뻘겋게 달구어 노예들의 등이나 가슴에 불도장을 찍었습니다. 또 부모와 자녀를 갈라서 매매를 하기도 했고, 노예들을 거세하거나 손가락이나 발가락을 자르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습니다. 또 노예들의 가죽을 벗기고 상처에 소금이나 후추를 뿌리고 반항하는 노예는 나무에 매달아 찢어 죽이는 충격적인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이 모든 걸 목격한 존 웨슬리는 노예매매와 노예 학대는 해 아래에서 볼 수 있는 가장 무서운 악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존 웨슬리는 노예를 매매하고 잔인하게 괴롭히는 백인들에게 하나님께서 반드시 심판을 내리실 것이라고 엄중하게 경고했습니다.

 

그는 감리교 부흥 운동을 시작하면서 노예 폐지 운동을 함께 벌여나갔습니다. 그는 설교와 반박문과 편지로 노예상들에게 노예매매와 학대를 즉각 중단하라고 촉구했습니다. 또 그는 노예 폐지를 주장하는 정치가들을 격려하고 지원했습니다. 그는 죽기 36일 전인 1791223일에 국회의원으로 노예해방운동에 누구보다 앞장섰던 윌버포스에게 격려하는 편지를 보냅니다. 그 편지에서 존 웨슬리는 영국과 미국에서 노예제도가 사라지는 날까지 하나님의 이름으로 싸우라고 윌버포스를 격려했습니다.

 

85세가 되던 해에 존 웨슬리는 노예무역으로 치부하고 호화롭게 사는 브리스톨 시 한복판에서 노예무역을 비판하는 설교를 강력하게 전합니다. 그는 설교 후에 그다음 날을 노예들의 해방과 자유를 위해 금식 기도하는 날로 선포하게 됩니다. 존 웨슬리는 평생 노예해방운동가로 살았고, 감리교인들은 존 웨슬리를 본받아 흑인노예들을 따뜻하게 대했고 많은 감리교인들이 노예해방운동에 참여했습니다. 존 웨슬리 사후에 윌버포스가 노예폐지법안을 제출할 때 서명자의 절반이 감리교인이었고, 1807년 영국에서 노예매매 폐지법이 제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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