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웨슬리 이야기 82) 전도와 성결과 구제가 통합된 부흥 운동

(존 웨슬리 이야기 82) 전도와 성결과 구제가 통합된 부흥 운동

시온 0 12


존 웨슬리가 평생 힘썼던 일은 크게 3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영혼을 구원하는 복음 전도 운동, 진실한 양심과 정직한 삶을 회복하는 성결 운동,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구제 운동입니다.

 

존 웨슬리는 이 3가지 운동을 하나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존 웨슬리는 감리교 부흥 운동을 시작하면서 이 3가지를 동시에 시작했습니다. 존 웨슬리는 복음을 전하면서 현실적인 문제를 발견하면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서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을 구체적으로 실천했습니다. 그가 가난한 사람을 위해 한 일은 너무나 많습니다. 존 웨슬리는 가난한 사람들의 필요를 발견하면 무엇이든지 주저하지 않고 도왔습니다.

 

존 웨슬리는 옥스퍼드 대학 시절부터 어린이들을 무척 좋아했습니다. 그의 어린이 사랑은 다양한 사역으로 열매를 맺었습니다. 감리교 부흥 운동 초기에 북부 광산지대 뉴캐슬에 고아원을 세워서 버려진 고아들과 광부의 아이들을 돌봤습니다.

 

이 뉴캐슬의 고아원은 고아원이면서 동시에 예배당, 가난한 아이들의 학교, 병원, 약국, 쉼터, 상담소, 직업 정보 센터, 신용조합, 급식소의 역할을 했습니다. 지금으로 표현하자면 종합 사회복지 센터의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이런 현상은 브리스톨에 세워진 최초의 예배당 뉴룸(New Room)과 런던 최초의 예배당 파운더리(Foundery)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났습니다. 이때부터 북부에 있는 감리교 교회는 고아와 과부의 교회로 불려졌습니다. 그 후 존 웨슬리의 고아 사역은 영국 전역에 고아원을 세워서 영국의 고아 대부분을 감리교회가 맡아서 기르는 데까지 이르게 됩니다.


존 웨슬리는 1748년 처음 감리교 부흥 운동이 시작되었던 킹스우드에 불쌍한 광부의 아이들을 위해 킹스우드 학교를 세웁니다. 그 후에 인근에 노동자들의 아이들을 위한 학교를 2개 더 세웁니다.

 

존 웨슬리는 북부 산업지대 노동자들의 아이들을 위하여 공장에 학교를 세웠는데, 사람들은 그 학교를 공장 학교또는 누더기 학교라고 불렀습니다. 존 웨슬리는 이 학교의 학생용 교재를 손수 써서 사용하게 했습니다. 그는 아이들에게 철저하고 완벽한 기독교 교육을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산업지대와 빈민 지역의 감리교 신도회는 감리교 예배당에서 주일학교를 열성적으로 부흥시켰습니다. 이 주일학교는 점점 주간학교로 발전했고, 존 웨슬리가 죽고 난 후인 1833년에는 영국 전역에 감리교 주간학교가 1,000개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1870년에는 영국 전역에 감리교 기숙학교가 67개나 되었습니다.

 

존 웨슬리는 아이들만 교육시킨 것이 아니라 성인들도 교육을 했습니다. 그는 신도회와 주간학교에서 어린이뿐만 아니라 공부를 하지 못한 성인들도 교육했습니다. 존 웨슬리는 18세기에 일어난 근대 성인 교육의 출발점이었습니다.

 

당시 영국은 남편들이 전쟁에서 죽고 노동 현장에서 죽고 감옥에 투옥되어 사형당한 과부들이 많았습니다. 당시 과부들의 삶은 저주 받은 것이었습니다. 존 웨슬리는 과부들을 위한 과부의 집을 많이 세웠습니다. 과부의 집은 노인의 집으로 발전했고 집이 없는 과부와 홀로 된 노인들이 모여 살게 되었습니다. 이런 과부의 집은 영국 전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존 웨슬리는 집 없이 방황하는 병자들과 노숙인들을 위해 거주할 집과 양식을 공급해주는 나그네 공동체(Stranger’s Friendly Society)’를 세웠습니다. 나그네 공동체는 감리교 신도회의 핵심적인 사회봉사로 발전하여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았고 왕실의 지원을 받으며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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